Ognuno recita il proprio ruolo, immerso in quella divina sensazione di devozione allo scopo comune: la realizzazione di un'opera d'arte, che anche la bonifica bellica sa idealizz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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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nuno recita il proprio ruolo, immerso in quella divina sensazione di devozione allo scopo comune: la realizzazione di un'opera d'arte, che anche la bonifica bellica sa idealizzare.

‘트럭에 실려 가는 길…살아 다시 못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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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2022 Corea del Sud, Jeju (Jeju-do)

 “If you ever come across anything suspicious like this item, please do not pick it up, contact your local law e enforcement agency for assistance”

Moseulpo.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군은 무기와 군수물자를 불사르기도, 폭탄과 탄환을 모슬포항으로 옮겨 바다에 수장시키기도 했다. 이때 모슬포항 부근에 쌓아둔 탄약이 폭발해 근처의 건물들이 기울어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탄환에 맞아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일부를 한라산 어딘가에 묻기도 했는데 산중에 묻힌 일본군 무기는 한라산 입산자들에게 발견돼 4·3 때 쓰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일본군이 이렇게 전후 처리를 하던 와중에1945년 9월 미군 선발대가 제주도에 상륙해 모슬포 대촌병사(大村兵舍·오무라 부대 병사들의 숙소)에 주둔한 후 일본군의 무기를 해체시킴과 동시에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해 일제에 의해 설치됐던 제주지역의 군사기지 및 시설들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허물어졌다. 그러나 모슬포에 있던 일본군 군사기지는 거의 파손되지 않았기에 해방직후 미군부대가 그대로 사용했다.미군정은 1946년 대촌병사 자리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를 창설해 주둔하기 시작했고 1948년 11월에는 제2연대가 주둔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51년에는 제주 제5훈련소,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등을 통합해 육군 제1훈련소가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되고 이와 함께 미군의 군사고문단이 주둔했다. 현재 대정지역에는 육군 제1훈련소 정문, 대정여고 안에 있는 육군 98병원터, 제3교육연대 정문, 강병대교회, 대정초등학교 내의 공군사관학교 훈적비, 하모리 모슬포 천주교회, 상모리 읍내에서 산이수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위치한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잔해 등 군사 유물유적들이 남아있다.특히 모슬포 섯알오름 지역에는 알뜨르비행장에 설치된 비행기 격납고, 고사(각)포 진지, 이교동 일제 군사시설, 송악산 진지갱도 등 태평양전쟁과 관련한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8개가 산재해 있어 지난날의 짙은 아픔을 전하고 있다. 송악산을 품고 있는 상모리와 하모리는 오래전에는 제1모슬리·제2모슬리·제3모슬리로 불리다가 영조 때 상모슬리‧하모슬리로 불리고, 상·하모리를 통칭할 때는 모슬리 또는 모슬포로 불려졌다고 전해진다. 모슬포라는 말은 모래를 말하는 ‘모살’과 포구를 뜻하는 ‘개’가 합쳐진 말이라 한다. 제주도의 서남단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송악산 일대는 일찍이 군사기지로 활용돼왔다. 송악산 일대에는 일제강점기에는 복합 군사기지가 한국전쟁 시에는 육군 제5훈련소가 설치됐다. 한국전쟁 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대구에서 창설된 육군 제1훈련소가 모슬포로 옮겨지고 국방부 제2조병창 등 많은 군사시설이 제주도에 설치됐다. 당시 제주청년들은 4·3 당시 무장대 토벌 차 이곳에 주둔하던 해병부대에서 단기간의 기초교육만을 받고 해병 3·4기로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게다가 송악산 주변에는 유엔군사령부의 중공군 포로수용소까지 설치되며 군사도시로 탈바꿈되기도 했다. 중공군 포로 중 본국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제주비행장에,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은 모슬포비행장에 수용되었는데 당시 모슬포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수는 1만4314명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제1훈련소는 1954년 8월 폐쇄되었지만 한국공군과 미군기지가 그 뒤를 이어받아 모슬포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명 맥내브(McNabb)기지라 불리는 미군기지가 1953년 1만여 평 규모로 설치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설치와 함께 미 제5공군 군사고문단이 이곳에 주둔해 알뜨르비행장을 사용했으며 1953년에서 1958년까지 맥내브 대령 지휘 아래 한때 근무병력이 15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맥내브 기지는 1995년 9월 미군이 철수한 후 주한미군 복지단 제주휴양소로 명칭을 변경해 사용하다가 2006년 7월 한국정부에 반환돼 마침내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일본과 미국 등 외국 군대의 제주섬 주둔의 역사가 마무리됐다. 한편 정부는 1987년 송악산 일대 195만평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1988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확정했다. 당시의 국방부 계획에는 200만 평 부지에 활주로의 길이가 3㎞ 규모인 군비행장이 들어서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해 지역주민과 도내 민주 재야 종교단체 등이 총망라된 송악산 군사기지설치 결사반대 도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러한 저항운동으로 1989년 3월 정부는 송악산군사시설보호구역 지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1992년 12월 국방부는 송악산군사시설보호구역 중 국유지를 제외한 138만평을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022년 제주특별법에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영구임대 받을 수 있는 명시조항이 들어가 발효되기에 이르렀다.현재 제주도는 이곳에 역사문화 공원 지정을 준비 중에 있다. 제주도 전역에서 일제가 파헤친 침략의 흔적들은 일제가 물러난 후에도 또다시 비극의 공간이 됐다. 해방공간에서 불어온 4·3광풍으로 무고한 죽음의 학살터로 변모했던 것이다. 섯알오름은 송악산 북쪽 편에 솟아있는 3개의 나지막한 봉우리 가운데 맨 서쪽의 오름이다. 오름 정상부에는 2개의 고각포 진지가 있고 오름 지하에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구축된 일본군 탄약고가 있었다. 1945년 9월말에서 10월초 사이에 미군 무장 해제팀에 의해 폭파된 탄약고 터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생겨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한국군은 전국적으로 수상한 혐의자를 미리 가두어놓는 이른바 ‘예비검속’을 시행하라는 문건을 경찰에 보냈다. 제주도 경찰에도 군경에 끌려간 적이 있거나 무장대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예비검속으로 구금해 집단사살 하라는 문건이 하달됐다. 이로 인해 1950년 7월과 8월 경찰과 군인(해병대)에 의해 예비검속자로 지목된 민간인 수백 명이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총살됐다. 1차 총살은 7월 16일부터 20일 사이에, 2차는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이뤄졌다. 제주도에서는 이 사건을 ‘섯알오름예비검속학살사건’이라 부른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부에서 제주경찰국 산하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 공문에는 “예비검속 중인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총살집행 후 결과를 보고하라”는 문건도 있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발표한 섯알오름 탄약고터의 희생자 수는 218명이다. 예비검속 제도는 해방 후 폐지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는 제도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를 받은 제주경찰은 불법적인 예비검속을 실시했던 것이다. 경찰은 4·3사건이나 좌익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예비검속자로 분류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무고나 밀고 또는 경찰과의 불화 등에 휘말린 이들이 예비검속된 경우도 많았다. 희생자들은 20~30대가 77%, 남자가 96%를 차지했으며 교사는 11명, 공무원 5명, 마을유지 5명 등 사회지도층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과 8월 당시 모슬포경찰서에 연행, 구금됐던 예비검속 대상 주민들은 해병대 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제5중대2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제3소대 소속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들에 의해 집단총살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수는 경찰이 작성한 문서에는 249명이란 기록도 있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희생자 수는 218명이다.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에는 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이, 새벽 5시에는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바로 이곳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집단학살 됐다. 섯알오름 희생자의 시신들은 학살된 이후에도 군 당국의 통제로 수습되지 못했다. 이후 군부대 확장공사를 하던 중 집단학살 된 유해들이 드러났다. 이후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한림지역과 모슬포 지역 유족들은 사건발생 6년만인 1956년 3월과 5월에 각각 한림읍 ‘갯거리오름 만벵디공동장지(63구 시신), 사계리 공동묘지(132구 시신)에 이장했다. 그러나 수습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 탓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시신별로 뼈를 맞출 수도 없었다. 다음은 묘역에 새겨진 시인 김경훈의 섯알 오름길이란 시의 전문이다.

Photo-Source: 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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